신문 1면 톱기사에 ‘자사고 참사’라는 표제가 붙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뜬금없이 지난 2016년 미국 대선의 ‘이변(異變)’이 뇌리에 스쳤다. 왠일인가?

그것은 당시 미국 민주당 후보로 모두가 당선을 기정사실로 여기던 힐러리 클린턴의 패배에 한국 교육의 ‘안전망 없는 추락’이 오버랩돼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둘의 공통점은 ‘진보의 배반’이다.

미국 민주당은 근로자와 중하층 서민과 소수인종 등을 대변하는 진보정당으로 인식되고 있다. 힐러리는 거기에 충실한 공약과 유세로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당선 확실’로 나타났다.

그러나 결과는 낙선이었다. 힐러리가 클린턴 전 대통령과 함께 월가 금융그룹과 끈끈한 관계를 맺고 한 번 강연에 몇백만 달러를 챙기는 ‘진보 귀족’이라는 사실을 대다수 유권자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진보 귀족·진보의 배신

서울의 13개 자사고 중 8개가 지정취소 당하는 ‘참사’가 있었던 날 학부모들은 서울교육청 조희연 교육감에게 “왜 자신은 두 아들을 외고에 보내고 우리 애들은 일반고에 보내라 하느냐”고 항변했다.

김상곤 전 교육부 장관을 비롯한 여러 인사들도 유사한 사례로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학교평준화가 그처럼 확고한 소신이고 자사고나 외고 등 특수학교는 폐지해야 할 ‘적폐’로 생각한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양반제도 폐지를 양반 출신이 주장할 때 더 설득력 있다”는 조희연 교육감의 말은 ‘개그’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무책임한  변명이다.

힐러리 못지 않은 ‘진보의 배신’이다.

그러나 자사고 ‘존폐’ 논란에는 일부 교육 책임자나 고위 관료들의 개인적 일탈을 넘어 그보다 훨씬 더 엄중하고 심각한 문제가 개재돼 있다. 거기에는 국가백년대계를 책임져야 할 한국교육의 미래가 걸려 있고 글로벌 경쟁세계에서 한국-한국민이 3등 국가-3등 시민으로 추락하느냐가 달려 있다.

현 정부의 자사고 폐지 결기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의 이행이며 ‘학교평준화’라는 교육정책의 실행이다.

만약 이런 명제가 옳다면 문재인 정부는 DJ정부조차 적폐의 심판대에 올려 놓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사고는 지난 2002년 DJ정부가 오랜 고교평준화 정책의 보완책으로 ‘수월성 교육’을 할 수 있는 학교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만든 ‘자립형’ 사립고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는 이번에 지정 취소된 전북 상산고와 민족사관고, 포항제철고 등 6개교만이 자사고로 지정됐다. 이후 이명박 정부는 ‘고교다양화’ 정책을 내세워 그 명칭을 ‘자율형’ 사립고로 바꾸고 2010년 32개교, 2011년 51개교까지 확대했다.

그렇다면 자사고의 수효가 너무 많으니 과거의 수준으로 되돌리겠다는 것인가?

자사고 지정이 취소된 학교와 학부모들은 또한 그 조치의 부당성으로 평가기준의 자의성과 결정과정의 ‘깜깜이’ 밀실 방식을 비난한다. 그러나 이 논란의 핵심은 그런 절차나 형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교육 이념’ 그 자체에 배치되는 반(反)교육적 행태이며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민간인이 자기 재산을 갖고 ‘수월성의 구현’이라는 교육 목표의 실현에 힘를 보태겠다는 자율적 선택을 부정하는 반(反)민주적 폭거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자유시장경제를 죄악시하고 ‘공정과 공평’를 지고(至高)의 가치로 떠받드는 극좌 진보주의로 경도돼 왔다. 경제적으로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구소련과 동구국가들의 사례에서 분명히 입증됐다.

그런데도 현 정부는 경제정책에서 갖가지 급진적 정책을 쏟아내더니 교육정책에서도 ‘자사고 참사’라는 폭력적 학교평준화를 밀어붙이고 있다.

경쟁 없는 경제 3류 국가 지름길

생각하기 나름으로 학교평준화가 평등사회, 공정사회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이라면 이번 사태를 좀더 인내하며 지켜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평등하고 모두가 똑같이 대우받는 사회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또 그런 사회는 결코 행복한 사회가 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재능과 능력이 태어날 때부터 각기 다르며 교육은 이런 사실을 전제로 각자의 재능과 능력을 최고도로 발현할 수 있도록 북돋아주는 ‘수월성의 구현’을 그 이상(理想)으로 하기 때문이다.

요즘 TV 뉴스프로에서는 눈길을 거두고 LPGA을 뛰는 한국 여자 골퍼들과 류현진의 메이저리그 경기, 손흥민의 축구 경기에 환호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분위기다.

왜 그런가? 정치는 3류이고 스포츠 세계의 한국인은 초일류기 때문이다. 그 스타들은 모두 국내 스포츠 교육의 제약과 한계를 피해 해외에서 고난도 훈련과 경쟁을 치르면서 오늘의 그들로 성장했다.

한 스포츠 기자는 “치열하고 공정한 경쟁을 포기하고 즐기는데만 의미를 둔 한국체육의 하향평준화는 희망이 없다”고 말한다.

교육도 전혀 다르지 않다. 학교평준화를 내세워 자사고를 없앨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려는 교육부를 없애고 이념교육을 내려 놔야 한국교육이 살아난다.

권화섭 hwasupkwon@hanmail.net

저작권자 © 안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